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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김영호 열사 구타 가능성...재조사 요구"

◀ANC▶
마산 3.15의거 희생자와 시위 참여자에 대한
진실 규명이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
어제 전해드렸는데요,

사망자 12명 가운데 한 명인 김영호 열사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즉사한 것이 아니라,
총상을 입은 뒤 파출소로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재조사가 불가피해 보입니다.

김태석 기자.
◀END▶

◀VCR▶
1960년 3월 15일 저녁,
마산중앙중 2학년생 김영호 씨는
마산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은
김 씨가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보도했고,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총상을 입은 뒤에도
상당 시간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당일 저녁 9시 45분쯤,
국제신문 이상윤 기자 등 3명은
불심검문에 불복하다
남성동 파출소에 끌려가 구타당했는데,

바로 옆에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은 채,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INT▶ 박홍기 / 경남민주화운동동지회장
"일어서다가 뇌출혈이다 싶어 '억'하면서 나자빠지더라. 그래서 자기(이상윤 기자)는 (김영호 씨가) 뇌진탕이 아닌가, 얻어 맞아가지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 씨의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보고
각목 등으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확신해,
강하게 항의했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INT▶ 박홍기
"총에는 맞았지만, 경찰 몽둥이나 이런 쪽에 맞아서 숨졌기 때문에, 화장은 하지 않고 그 증거로서 (아들을) 매장했다고 합니다"

또 언론들은 김 씨의 사망 시각을
저녁 7시쯤으로 보도했지만,
실제론 9시 반쯤 총에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INT▶ 조삼영 / 김영호 열사 동기
"(마산역에서 모인 시각이) 대략 7시가 조금 안 됐지, 안 돼서, 북마산으로 가자고 해서, 북마산파출소로 간 시각인데, 그 시각엔 (김영호 씨가) 안 죽었죠. 그건 내가 확실히 장담합니다"

사망 장소도 쟁점입니다.

1960년 3월 26일 국회조사에서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은
CG)김영호 씨가 북마산파출소에서 중상을 입어
도립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진술했지만,

CG)당시 도립병원장은
밤 11시 쯤 마산중앙중 교복에
배지를 단 학생이 마산시청 지하실에
들어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김영호 열사의 사망과 관련한
다른 증언과 정황이 속속 발견되자,
유족 등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재조사를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MBC뉴스 김태석.
◀END▶
김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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