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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경남_HOTcilp000002

"고분 더 있다"...천장석에 붓글씨 왜?

◀ 앵 커 ▶
가야 멸망기 귀족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김해 구산동고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 현장이 공개됐습니다.

기존 1,2호 두 기의 고분 외에도
추가로 3~4개의 무덤이 더 있을 가능성이
확인됐고, 무덤 내부 천장석에는
한국전쟁 당시 누군가 쓴 붓글씨까지
새롭게 발견돼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박종웅 기자
◀ 리포트 ▶
가야 멸망기 7세기 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구산동고분입니다.

직경 14미터의 봉분 외연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대형 석재의 호석이 쌓여 있습니다.

석실묘 내부는 길이 2.8, 너비 2.4미터로
석실 벽면 전면에 두껍게 석회를 발랐습니다.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석실묘는
신라에 편입된 가야 후손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석실에 딸린 배장묘에선 인화문토기가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발굴조사에선 기존에 알려진
삼국시대 분묘와 함께 청동기시대 분묘 시설,
여기다 조선시대 여제단의 흔적까지도
찾아냈습니다.

또한 국가 사적인 김해 구산동고분 1,2호기
외에도 주변에 여러 개의 무덤이 더 있을
가능성을 확인한 것도 성과로 꼽힙니다.

◀ INT ▶송원영 /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장
\"1,2호분 사이에 3~4기 정도의 거대한 봉분이 더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국가유산청과 협의를 해서...\"

(S/U)추가 봉분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구산동고분군에 대한 사적 지정범위 확대조정이 필요해졌습니다.

김해 구산동고분군은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당시 도굴된 흔적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았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무덤은
196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구산동 고분군 중
제2호분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1호분과 함께
1910년대 도쿄제국대학에 의해 도굴돼
무덤에 있던 유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반출돼
이후 관동대지진 당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INT ▶정인성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일제강점기,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진행된
고적조사의 내용들을 우리 고고학계가 우리의 시선으로 정확하게 검증해 낼 수 있는...\"

2호분 석실 내부 천장석입니다.

누군가 써 놓은 붓글씨가 발견됐습니다.

(cg)73년 전인 단기 4284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이 고분에서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시굴을 기념해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cg)고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6명의 등장 인물들 중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서울대 교수 등이 함께 했고 고분 인근
김해농고 학생 30명도 참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분 내부에 붓글씨 기록 발견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일부 문화유산 훼손 논란에 대해
학계에서는 당시 무슨 연유로 발굴이 이뤄졌고
또 남아 있는 관련 기록들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찾아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 INT ▶정인성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6.25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학생들을 데리고
지역에 있는 유적을 스스로 조사를 했다는 데 더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게 아닌가?\"

이달 마무리 되는 김해 구산동고분군
학술발굴조사는 고분군 보존과
정비대책 등 적잖은 과제를 남겼습니다.

MBC NEWS 박종웅
◀ END ▶
박종웅